잡록JAPROK MAGAZINE

매트릭스는 1995년의 질문을 낡게 만들었어요

매트릭스 초반, 남자가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냅니다. 그리고 표지를 열자 속이 파여 있어요. 거기 불법 디스크를 숨겨뒀거든요. 카메라가 그 책의 제목을 잠깐 비춥니다.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원본 없는 복제를 다룬 책이고, 이 영화는 그 책을 속을 파내서 씁니다.

핵심 요약

  • 이 영화는 철학 개념을 설명하지 않고 써먹습니다. 속을 파낸 책이 그 선언이에요.
  • 불릿 타임은 실제 카메라로 찍었는데 결과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이미지입니다. 찍은 것이면서 만든 것이에요.
  • 그래서 이 영화는 1995년의 질문에 답한 게 아니라 그 질문을 낡게 만들었습니다.

매트릭스는 개념을 설명하지 않고 써먹습니다

저는 이 속을 파낸 책이 이 영화 전체의 요약이라고 생각합니다.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르는 이런 겁니다. 원본을 베낀 복제가 아니라, 애초에 원본이 없는 복제. 지도가 영토를 대신하다가 결국 영토가 사라지는 상태요.

보통 영화라면 이 개념을 설명했을 겁니다. 누군가 강의하듯 말하는 장면을 넣었겠죠.

이 영화는 다르게 합니다. 그 책을 소품으로 씁니다. 그것도 내용이 제거된 상태로요.

책의 상태 영화가 하는 말
표지는 그대로 겉모습은 남아 있다
속은 파여 있다 원본은 이미 없다
그 안에 다른 걸 넣는다 빈자리에 복제가 들어온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개념을 인용한 게 아니라 실연합니다. 이게 이 영화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첫 번째 이유예요.

재미있는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정작 보드리야르 본인은 이 영화가 자기 개념을 오해했다고 봤다고 알려져 있어요.

이유가 날카롭습니다. 영화는 매트릭스 밖에 진짜 현실이 있다고 전제하잖아요. 그런데 보드리야르의 요점은 정반대였습니다. 빠져나갈 바깥이 없다는 것이었거든요.

저는 이 어긋남이 흠이 아니라고 봅니다. 이 영화는 철학을 정확히 옮기려던 게 아니라 그것으로 이야기를 만들려던 것이니까요. 다만 그 차이를 알고 보면 결말이 다르게 읽힙니다.

착각 주의

이 영화를 철학이 어려운 SF로 미루기 쉬운데, 정작 영화는 개념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보여주고 넘어가요. 몰라도 따라갈 수 있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파인 책이 하는 말
표지는 그대로
겉모습은 남아 있다
속은 파여 있다
원본은 이미 없다
그 안에 다른 걸 넣는다
빈자리에 복제가 들어온다

빨간 약보다 사이퍼가 무섭습니다

가장 유명한 장면은 알약 두 개죠. 하지만 이 영화에서 저를 가장 오래 붙든 인물은 주인공이 아니라 사이퍼입니다.

그는 이미 빨간 약을 먹은 사람이에요. 진실을 알고, 바깥에서 몇 년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돌아가기로 합니다.

식당에서 스테이크를 썰면서 그가 말해요. 이게 가짜인 줄 안다고. 씹는 순간 뇌가 만들어낸 신호라는 것도 안다고. 그런데 맛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덧붙이죠. 무지가 축복이라고.

인물 선택 근거
네오 진실을 택한다 가짜인 걸 못 견딘다
사이퍼 가짜로 돌아간다 진실이 더 나은 삶이 아니었다

이 장면이 무서운 이유는 그의 말이 완전히 틀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깥의 삶은 춥고 배고프고 죽음에 가깝습니다. 진실을 안다고 삶이 나아지지 않았어요. 영화는 그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빨간 약은 더 좋은 선택지가 아니라 불편한 쪽입니다. 이 영화가 안일한 자기계발 우화로 떨어지지 않는 지점이 여기예요.

그리고 여기서 앞서 다룬 영화 하나가 겹칩니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두 사람은 최악을 알고도 다시 하겠다고 했죠. 사이퍼는 정확히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알았기 때문에 되돌리겠다는 쪽이에요.

같은 질문에 두 영화가 반대로 답한 셈입니다.

처음엔 놓치는 장면

매트릭스가 재현하는 연도는 1999년입니다. 이 영화가 개봉한 바로 그해예요. 극장에 앉은 관객에게 당신이 사는 지금이 그 가짜라고 말하는 구조입니다.

매트릭스에서 가짜인 줄 알면서 먹는 스테이크
매트릭스에서 가짜인 줄 알면서 먹는 스테이크

실제로 찍었는데 불가능한 그림이 나옵니다

이제 이 시리즈의 기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1995년에 완전한 인공과 완전한 날것이 같은 해에 도착했다는 것.

매트릭스는 그 축의 어느 쪽에 있을까요. 답은 양쪽 다입니다.

이 영화의 상징이 된 불릿 타임을 보죠. 시간이 멈춘 듯한데 카메라만 인물 주위를 도는 장면이요.

이건 컴퓨터로 그린 게 아닙니다. 카메라를 수십에서 수백 대 줄지어 배치하고 순차적으로 터뜨려서 찍었어요. 그다음 그 사진들을 이어 붙인 겁니다.

구분 불릿 타임
수단 실제 카메라, 실제 배우
결과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시점 이동
성격 찍은 것이면서 만든 것

여기가 핵심입니다. 도그마 95는 꾸미면 가짜라고 했고 토이 스토리는 찍지 않아도 영화라고 했어요. 매트릭스는 그 사이에 서서 그 구분이 이미 성립하지 않는다고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형식이 내용과 같은 방향을 봅니다. 이 영화의 주제가 무엇이 진짜냐는 물음이잖아요. 그 물음을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없게 만든 이미지로 던진 겁니다.

형식과 내용이 이만큼 정확히 겹치는 경우는 드뭅니다. 저는 그래서 이 영화를 1위에 뒀습니다.

이 작품은 1999년에 나왔고 이듬해 2000년 아카데미에서 편집·음향·시각효과 등 4개 부문을 받았습니다. 전부 만드는 방식에 관한 상이었어요.

작품 정보는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영화진흥위원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시 볼 때 확인할 것


네오가 디스크를 숨긴 책의 제목이 무엇인가


매트릭스가 재현하는 연도가 몇 년인가


사이퍼가 스테이크를 썰며 하는 말이 무엇인가


불릿 타임 장면에서 카메라가 어떻게 움직이는가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이 영화가 스스로 세운 기준으로 짚겠습니다.

이 영화의 주제는 선택입니다. 알약 두 개가 그 선언이고, 영화 내내 고르는 행위가 반복돼요.

그런데 주인공은 선택받은 자입니다. 예언이 있고, 그가 그 예언의 대상이라는 게 처음부터 암시됩니다. 마지막에 그가 각성하는 것도 정해져 있던 일이 일어난 쪽에 가까워요.

선택을 말하는 영화가 운명론으로 닫히는 겁니다. 이건 구조적인 모순이에요.

이후 속편들이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려 합니다. 선택이 진짜 선택인지, 예언조차 통제의 일부인지를요. 야심 찬 시도였지만 1편만큼 정리되지는 못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입니다.

두 번째는 세계관의 설정입니다. 인간을 에너지원으로 쓴다는 전제는 물리적으로 따지면 허술합니다. 자주 지적되는 지점이에요.

다만 저는 이게 큰 흠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 설정의 역할은 과학적 설명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도 모르게 무언가를 위해 소비되고 있다는 감각을 만드는 것이니까요.

세 번째는 이 영화 탓이 아닌데 언급해둘 만합니다. 빨간 약이라는 표현이 이후 전혀 다른 맥락으로 쓰이면서 원래 의미와 멀어졌어요. 지금 이 영화를 처음 보는 사람은 그 오염된 용법을 먼저 접했을 수도 있습니다.

함정

이 영화를 깨어나라는 이야기로만 요약하면 사이퍼가 사라집니다. 영화는 깨어난 삶이 더 낫다고 말하지 않아요. 다만 불편한 쪽을 택한 사람을 따라갈 뿐입니다.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매트릭스, 그리고 열 편을 닫으며

다시 속을 파낸 책으로 돌아가 보죠.

하나, 이 영화는 개념을 설명하지 않고 실연합니다. 원본이 비어 있는 책이 그 선언이에요.

둘, 빨간 약은 더 좋은 선택지가 아닙니다. 사이퍼가 그 사실을 증명해요.

셋, 실제로 찍었는데 불가능한 그림이 나옵니다. 찍은 것과 만든 것의 구분이 여기서 무너져요.

이 시리즈는 1995년에서 출발했습니다. 영화 100주년이 되던 해에 토이 스토리와 도그마 95가 같이 도착했고, 그 뒤 30년의 영화가 그 두 극단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는 이야기였죠.

매트릭스는 그 질문에 답한 게 아닙니다. 그 질문을 낡게 만들었어요. 찍은 것이냐 만든 것이냐를 묻는 대신, 그 구분이 가능하냐고 되물었으니까요.

그리고 지금 우리가 어디 있는지 보세요. 인공지능이 이미지를 만드는 시대입니다. 무엇이 촬영이고 무엇이 생성인지 화면만 보고는 구분되지 않아요.

1999년에 나온 이 영화가 여전히 가장 정확한 비유인 이유입니다. 빨간 약, 매트릭스에 갇혔다는 말. 우리는 아직 이 영화가 만든 어휘로 지금을 설명하고 있어요.

열 편을 한 줄씩 이어보면 이렇습니다.

작품 남긴 문장
화양연화 말하지 못한 것은 보관된다
매드맥스 구원은 돌아와서 만드는 것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만들어지지 않는 것도 있다
이터널 선샤인 지워도 남는다
멀홀랜드 드라이브 지어낸 것도 남는다
다크 나이트 지키려면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
토이 스토리 실물이 없어도 감정은 남는다
펄프 픽션 순서가 의미를 바꾼다
기생충 몸에 밴 것은 지워지지 않는다
매트릭스 무엇이 진짜인지 묻는 법

다 적고 나서 저도 알았는데, 열 편이 전부 남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지우려 해도, 잊으려 해도, 벗어나려 해도 남는 것들이요.

좋은 영화가 하는 일이 그것 아닐까 싶습니다. 지워지지 않는 것을 정확히 지목하는 일.

긴 목록 함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여러분의 1위는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어떤 기준으로 그렇게 정하셨는지 댓글로 알려주세요. 저는 순위보다 기준을 읽는 게 늘 더 재미있더라고요.

열 편이 남긴 문장
1
화양연화
말하지 못한 것은 보관된다
2
매드맥스
구원은 돌아와서 만드는 것이다
3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만들어지지 않는 것도 있다
4
이터널 선샤인
지워도 남는다

자주 묻는 질문

Q보드리야르 책을 읽어야 이해되나요?

전혀 아닙니다. 영화는 개념을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고 넘어가요. 다만 그 책이 나온다는 걸 알고 보면 초반 장면 하나가 다르게 읽힙니다.

Q불릿 타임은 CG인가요?

순수 CG가 아닙니다. 여러 대의 카메라를 줄지어 배치해 순차 촬영하고 그 이미지를 이어 붙인 방식이에요. 실제로 찍은 것에서 출발합니다.

Q속편도 봐야 하나요?

1편만으로 완결됩니다. 속편은 선택과 운명이라는 1편의 미해결 지점을 정면으로 다루려 하지만, 1편만큼 정리되지 않았다는 평이 많아요. 관심이 생기면 그때 보셔도 늦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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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 글의 해석은 글쓴이의 의견이에요. 개봉 연도와 수상 내역 등 사실 정보는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영화진흥위원회 자료를 참고했고, 촬영 방식과 철학자의 평가에 관한 내용은 알려진 인터뷰와 보도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작품 이해에 필요한 범위에서 줄거리와 결말을 언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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