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록JAPROK MAGAZINE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꿈을 소재가 아니라 문법으로 씁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실렌시오 극장 장면입니다. 무대에서 여자가 노래를 부르는데 목소리가 압도적이에요. 그러다 그녀가 쓰러집니다. 그런데 노래는 계속됩니다. 사회자가 미리 말해뒀죠. 여기 밴드는 없다, 전부 녹음이다, 전부 환상이다. 알고 들었는데도 관객은 울고 있었습니다.

핵심 요약

  • 이 영화는 꿈을 소재로 다루는 게 아니라 꿈의 작동 방식을 그대로 서사 문법으로 씁니다.
  • 파란 상자가 열리는 지점을 경계로 인물 이름과 성격이 통째로 바뀌어요.
  • 해석이 갈리는 건 이 영화가 실패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설계됐기 때문입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꿈의 문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저는 이 극장 장면이 이 영화의 사용설명서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영화가 관객에게 직접 말합니다. 이건 전부 녹음이고 환상이다. 그런데도 감정은 진짜로 발생해요. 가짜라고 미리 알려줘도 눈물이 납니다.

이게 이 영화가 하려는 일입니다. 사실이 아니어도 감정은 사실이라는 것.

보통 영화에서 꿈은 소재로 쓰입니다. 꿈 장면이 나오고, 깨어나고, 그게 꿈이었다고 알려주죠. 관객은 어디까지가 꿈인지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그 구분을 없앱니다. 꿈을 문법 자체로 삼아요.

꿈의 특징 이 영화에서
사람이 뒤바뀐다 같은 배우가 다른 이름으로 등장
맥락 없이 장면이 바뀐다 연결 없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감
중요한 게 사소하게 나온다 결정적 단서가 지나가듯 놓임
깨고 나면 앞뒤가 안 맞는다 후반부가 전반부를 배반함

그래서 이 영화를 볼 때 느끼는 혼란은 이해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꿈을 꾸는 동안 그 꿈이 이상하다는 걸 모르는 것과 같은 상태예요.

착각 주의

이 영화를 어려운 영화로 분류하기 쉬운데, 정확히는 다른 규칙으로 쓰인 영화예요. 인과를 따라가려 하면 계속 미끄러집니다. 규칙이 인과가 아니거든요.

꿈의 특징이 이 영화에서
사람이 뒤바뀐다
같은 배우가 다른 이름으로 등장
맥락 없이 장면이 바뀐다
연결 없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감
중요한 게 사소하게 나온다
결정적 단서가 지나가듯 놓임
깨고 나면 앞뒤가 안 맞는다
후반부가 전반부를 배반함

파란 상자가 경계선입니다

영화 중반, 두 여자가 파란 상자를 열어요. 그리고 그 지점을 지나면 영화가 다른 영화가 됩니다.

인물의 이름이 바뀝니다. 성격도 바뀌고요. 밝고 씩씩하던 사람이 비참하고 질투에 찬 사람이 돼 있어요. 기억을 잃었던 사람은 성공한 배우가 돼 있습니다.

상자 이전 상자 이후
희망에 찬 신인 일이 끊긴 배우
기억을 잃은 여자를 돕는다 그 여자에게 버림받는다
오디션에 성공한다 배역을 빼앗긴다
사랑이 이루어진다 사랑이 끝나 있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독법은 이렇습니다. 앞부분이 꿈이고 뒷부분이 현실이라는 거예요.

이 독법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가 있습니다. 앞부분의 모든 요소가 뒷부분에 원재료로 흩어져 있거든요.

식당 종업원의 이름표, 지나가던 사람의 얼굴, 무심코 들린 대사. 꿈이 하는 일이 정확히 그거죠. 낮에 스친 조각들을 모아 소원대로 다시 조립하는 것.

그렇게 보면 앞부분은 한 사람이 자기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됩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 나는 좋은 사람이었다고, 우리는 사랑했다고요.

그런데 여기서 멈추면 아쉽습니다. 이 영화는 그 독법이 맞다고 확인해주지 않아요. 확인해주는 순간 꿈이 아니라 퍼즐이 되기 때문입니다.

제작 경위도 이 구조에 한몫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원래 1999년에 드라마 파일럿으로 촬영됐다가 편성이 무산됐고, 그 뒤 2년쯤 지나 극장 영화로 다시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래서 앞부분에는 드라마로 이어가려던 여러 갈래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회수되지 않는 인물과 사건이 많은 이유예요. 사고가 결과적으로 형식이 된 경우입니다.

이 함정을 조심하세요

이 영화는 원래 드라마 파일럿으로 만들어졌다가 편성이 무산돼 극장 영화로 다시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앞부분이 유난히 여러 갈래로 뻗어 있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사고가 결과적으로 형식이 된 경우입니다.

파란 상자를 사이에 두고
항목
상자 이전
상자 이후
주인공의 처지
희망에 찬 신인
일이 끊긴 배우
관계
기억 잃은 여자를 돕는다
그 여자에게 버림받는다
오디션
성공한다
배역을 빼앗긴다
사랑
이루어진다
끝나 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경계가 되는 파란 상자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경계가 되는 파란 상자

해석이 갈리도록 설계됐습니다

이 영화에 대해 가장 자주 나오는 질문은 정답이 뭐냐는 겁니다.

데이비드 린치는 평생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어요. 설명을 요구받을 때마다 영화가 답이라는 식으로 비켰습니다.

저는 그게 신비주의가 아니라 작업 원칙이었다고 봅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감독이 정답을 말하는 순간, 이 영화는 암호가 됩니다. 암호에는 푸는 재미가 있지만 한 번 풀리면 끝이에요. 답을 알고 다시 보면 그냥 확인 작업이 됩니다.

반면 답이 없으면 매번 다시 봐야 합니다. 그리고 볼 때마다 조금씩 달라져요. 그게 꿈을 대하는 방식이기도 하죠. 우리는 자기 꿈도 해석하지 못하잖아요.

정답이 있는 영화 이 영화
한 번 풀면 끝난다 매번 다르게 조립된다
맞히면 이긴다 맞힌다는 개념이 없다
해석이 수렴한다 해석이 갈린 채 공존한다

이 영화는 2001년에 나왔고 그해 칸에서 감독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5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해석이 갈려요. 저는 그 지속력이 이 영화의 성취라고 생각합니다.

비교해보면 감이 옵니다. 반전으로 유명한 영화들은 대체로 몇 달이면 정답이 굳어지고, 그 뒤에는 스포일러 한 줄로 요약돼요. 이 영화는 그게 안 됩니다. 요약할 정답이 없으니까요.

작품 정보는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영화진흥위원회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

다시 볼 때 확인할 것


앞부분에 나온 이름표와 얼굴이 뒷부분 어디에 있는가


파란 상자 전후로 배우가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가


극장 장면의 대사가 무엇을 미리 알려주는가


카메라가 유난히 오래 머무는 사물이 무엇인가

이 영화가 진짜로 다루는 것

꿈 이야기만 하면 절반입니다. 이 영화가 무대로 삼은 곳이 어디인지 봐야 해요. 할리우드입니다.

제목의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로스앤젤레스의 언덕길이에요. 아래로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길입니다.

그리고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이 하는 일을 보세요. 배역을 따내고, 빼앗기고, 누군가에게 캐스팅을 강요당합니다. 감독은 자기 영화의 주연을 스스로 정하지 못해요.

그러니까 이 영화는 연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연기가 무엇인지 계속 되묻죠.

가장 유명한 장면이 오디션 장면이에요. 앞서 대사를 연습할 때는 유치하고 뻣뻣하게 읽던 대사가, 실제 오디션에서는 완전히 다른 온도로 살아납니다. 같은 대사인데요.

저는 이 장면이 극장 장면과 이라고 봅니다.

극장 장면 오디션 장면
진짜가 아니라고 미리 알려준다 연기라는 걸 모두가 안다
그래도 눈물이 난다 그래도 진짜가 된다

둘 다 같은 말을 합니다. 가짜라는 걸 알아도 감정은 발생한다.

그렇다면 앞부분의 꿈도 마찬가지예요. 사실이 아니라고 해서 거기 담긴 감정까지 가짜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죠. 그렇게까지 아름답게 지어냈다는 건 현실이 그만큼 아팠다는 뜻이니까요.

함정

이 영화를 꿈이었네로 정리하면 가장 중요한 걸 놓칩니다. 꿈이라는 사실보다 왜 하필 그런 꿈이었나가 핵심이에요. 꿈의 내용이 곧 그 사람의 후회 목록입니다.

이 영화가 진짜로 다루는 것
이 영화가 진짜로 다루는 것

멀홀랜드 드라이브, 정리하면

다시 그 극장으로 돌아가 보죠. 밴드는 없다, 전부 녹음이다, 전부 환상이다.

하나, 이 영화는 꿈을 소재가 아니라 문법으로 씁니다. 그래서 인과로 따라가면 계속 미끄러져요.

둘, 파란 상자가 경계입니다. 그 전후로 이름과 성격이 통째로 바뀌어요.

셋, 해석이 갈리도록 설계됐습니다. 정답을 주면 꿈이 퍼즐이 되기 때문이에요.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생각한 건 가짜라고 알려주고도 울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영화라는 매체가 딱 그렇잖아요. 우리는 저게 배우이고 세트이고 편집이라는 걸 압니다. 그런데도 극장에서 울어요.

그러니까 이 영화의 결론은 이겁니다. 지어낸 이야기가 주는 감정은 지어낸 감정이 아닙니다.

앞선 편들과 이어보면 이렇습니다. 화양연화가 말하지 못한 것을 보관했고, 매드맥스가 돌아와서 만들었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만들어지지 않는 것도 있다고 했고, 이터널 선샤인이 지워도 남는다고 했다면,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지어낸 것도 남는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 꿈이라고 보셨나요. 저는 앞부분이 꿈이라는 독법으로 보다가도, 볼 때마다 확신이 조금씩 줄어듭니다. 댓글로 알려주세요.

자주 묻는 질문

Q정말 앞부분이 꿈인가요?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독법이지만 영화가 확인해주지는 않습니다. 앞부분의 요소들이 뒷부분에 원재료로 흩어져 있다는 점이 근거예요. 다른 독법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Q왜 이렇게 앞뒤가 안 맞나요?

의도된 구성으로 봅니다. 꿈의 작동 방식을 서사 문법으로 삼았기 때문이에요. 여기에 드라마 파일럿으로 시작했다가 영화로 완성된 제작 사정도 겹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Q감독은 왜 설명을 안 했나요?

설명하는 순간 꿈이 퍼즐이 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답이 정해지면 한 번 풀고 끝나요. 답이 없어야 매번 다시 조립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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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 글의 해석은 글쓴이의 의견이에요. 이 작품은 정해진 해석이 없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본문의 독법도 여러 갈래 중 하나입니다. 개봉 연도와 수상 내역 등 사실 정보는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영화진흥위원회 자료를 참고했고, 제작 과정에 관한 내용은 알려진 보도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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