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록JAPROK MAGAZINE

최고의 영화 10편을 고르고 나니 1995년이 남았습니다

1990년대 이후 최고의 영화를 고르려면 기준이 있어야겠죠. 저는 1995년을 기준으로 잡았습니다. 뤼미에르 형제가 파리의 한 카페에서 돈을 받고 영화를 튼 게 1895년 12월 28일이니, 1995년은 영화가 태어난 지 딱 100년 되는 해예요. 그리고 그해에 정반대 방향의 사건이 두 번 일어납니다.

핵심 요약

  • 1995년에 토이 스토리와 도그마 95 선언이 나왔어요. 완전한 인공과 완전한 날것이 같은 해에 도착했습니다.
  • 그 뒤 30년의 영화는 이 두 극단 사이 어딘가에 자리를 잡았어요. 이 글의 순위는 그 축으로 매겼습니다.
  • 1위는 매트릭스입니다. 왜 기생충이 아닌지도 본문에서 이야기합니다.

1995년에 두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1위, 그리고 왜 기생충이 아닌가

1995년은 영화가 태어난 지 딱 10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그런데 이 해에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나요. 방향이 완전히 반대입니다.

하나는 토이 스토리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컴퓨터로 만든 최초의 장편 영화였어요. 카메라도 없고, 배우도 없고, 빛도 없습니다. 실물을 찍지 않은 영화가 극장에 걸린 겁니다.

다른 하나는 덴마크에서 나온 도그마 95 선언이에요. 라스 폰 트리에와 토마스 빈터베르그가 만든 규칙인데, 내용이 이렇습니다. 세트를 짓지 마라. 조명을 쓰지 마라. 카메라는 손에 들어라. 후시 음악을 넣지 마라.

구분 토이 스토리 도그마 95
방향 완전한 인공 완전한 날것
주장 찍지 않아도 영화다 꾸미면 영화가 아니다
같은 해 1995년

저는 이게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100년이 되는 시점에 영화가 자기 정체를 다시 물은 겁니다. 영화란 세계를 찍는 것인가, 아니면 세계를 만드는 것인가.

그리고 지난 30년의 영화들은 전부 이 두 극단 사이 어딘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축으로 순위를 매겼어요. 흥행도 아니고 상도 아니고, 이 질문에 얼마나 자기 대답을 내놨는가입니다.

착각 주의

최고의 영화 목록을 좋아하는 순서로 착각하기 쉬운데, 그건 취향 목록이죠. 순위는 기준의 표명입니다. 기준 없는 순위는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 글이에요.

최고의 영화 10위에서 7위까지

10위 · 화양연화 (2000)
왕가위가 만든 억제의 영화입니다. 두 사람은 끝내 아무 일도 하지 않아요. 대신 복도, 계단, 국수 그릇, 그리고 스텝 프린팅으로 늘어진 시간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말하지 않은 것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법을 이 영화만큼 보여준 작품이 드뭅니다.

9위 ·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2015)
도그마 95 쪽 극단에 가장 가까이 간 블록버스터예요. 실제로 차를 만들고 실제로 사막에서 굴렸습니다. CG 시대에 실물의 무게가 왜 다른지를 증명했어요. 대사도 거의 없습니다. 두 시간짜리 추격 하나로 캐릭터를 다 설명해요.

8위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2007)
음악이 거의 없습니다. 클라이맥스라 할 장면은 화면 밖에서 일어나고요. 관객이 기대하는 대결을 끝까지 안 보여줍니다. 장르의 문법을 정면으로 거스르면서도 완성도가 흔들리지 않아요.

7위 · 이터널 선샤인 (2004)
기억을 지우는 이야기인데, 특수효과가 아니라 편집과 미술로 기억의 붕괴를 보여줍니다. 사람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배경이 먼저 무너져요. 인공과 날것을 한 화면에서 섞은 드문 예입니다.

놓치면 아까운 것

이 네 편은 덜어내서 최고의 영화가 됐습니다. 음악을 빼고, 대사를 빼고, 결정적 장면까지 뺐어요. 화려한 걸 채운 영화가 잘 만든 영화라고 줄 알기 쉬운데, 뺀 자리를 관객이 채우게 만드는 쪽이 훨씬 어렵습니다.

최고의 영화를 가른 필름과 디지털의 대비
최고의 영화를 가른 필름과 디지털의 대비

6위에서 4위까지

6위 · 뮬홀랜드 드라이브 (2001)
데이비드 린치가 남긴 미로입니다. 전반부와 후반부의 관계를 두고 지금도 해석이 갈려요. 저는 이 영화가 설명을 거부한 게 아니라 설명이 불가능한 것을 찍었다고 봅니다. 꿈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서사가 아니라 구조로 보여준 작품이에요.

5위 · 다크 나이트 (2008)
히어로 장르를 범죄 드라마로 끌어내렸습니다. 그리고 조커라는 캐릭터로 동기 없는 악을 세워놨어요.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답이 없습니다. 그 공백이 이 영화를 지금까지 살려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4위 · 토이 스토리 (1995)
앞에서 말한 그 영화입니다. 기술사적 사건이라서 넣은 게 아니에요. 기술이 이야기를 이겼다면 이 자리에 못 왔을 겁니다. 주인에게 잊히는 장난감이라는 설정 하나로, 완전히 인공적인 화면에서 상실이라는 감정을 꺼냈어요. 그게 진짜 사건입니다.

순위 작품 축에서의 위치
6 뮬홀랜드 드라이브 실재를 의심
5 다크 나이트 장르를 현실로
4 토이 스토리 인공의 극단
놓치기 쉬운 것

토이 스토리를 애니메이션 한 편으로만 보면 이 순위를 놓칩니다. 이 목록의 나머지 아홉 편 중 상당수가 이 영화가 연 문으로 들어왔어요. 그 무게를 빼고 순위를 매길 수는 없었습니다.

3위와 2위

3위 · 펄프 픽션 (1994)
이 목록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이고, 가장 많이 복제된 작품입니다. 시간 순서를 흩어놓고, 주인공을 중간에 죽이고, 사건의 결말보다 차 안에서 나누는 잡담에 더 긴 시간을 줬어요.

지금 보면 익숙하죠. 그건 이 영화가 이긴 결과입니다. 이후 30년의 독립영화가 여기서 파생됐어요. 1994년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고, 그 순간부터 영화의 문법이 갈라졌습니다.

2위 · 기생충 (2019)
계단이 곧 계급이고, 냄새가 곧 신분입니다. 공간과 감각만으로 사회 구조를 설명해요. 설명하는 대사가 거의 없다는 게 이 영화의 힘입니다.

2019년 칸 황금종려상에 이어 이듬해 아카데미 작품상까지 받았죠. 비영어 영화로는 처음이었습니다. 이건 한 편의 성취를 넘어 중심이 이동한 사건이었어요. 100년 동안 영화의 중심은 한 곳이었는데, 그게 더 이상 아니라는 걸 공표한 겁니다.

많은 분들이 이 자리에 기생충이 1위여야 한다고 생각하실 거예요. 저도 오래 고민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다음 문단에서 하겠습니다.

이 목록을 고른 기준


찍은 것인가 만든 것인가 — 자기 대답이 있는가


그 대답이 이후 영화의 문법을 바꿨는가


기술이 아니라 이야기가 앞에 있는가


지금 다시 봐도 낡지 않았는가

1위, 그리고 왜 기생충이 아닌가

1위 · 매트릭스 (1999)

이 영화를 1위에 둔 이유는 액션이 아닙니다. 1995년의 질문에 가장 정확하게 답했기 때문이에요.

토이 스토리는 실물 없이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도그마 95는 꾸미면 가짜라고 했고요. 매트릭스는 그 사이에 서서 이렇게 물어요. 그러면 우리가 실물이라고 믿는 이건 뭔가?

이 영화가 대단한 건 그 질문을 철학 논문이 아니라 블록버스터의 형식으로 던졌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걸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촬영 기법까지 만들어냈어요. 시간이 멈춘 채 카메라만 도는 그 장면 말입니다. 인공으로 만든 이미지로 인공에 대해 말한 거죠. 형식과 내용이 같은 방향을 봅니다.

게다가 이 영화는 우리가 지금 쓰는 어휘를 만들었습니다. 빨간 약이라는 말, 매트릭스에 갇혔다는 표현. 알고리즘이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줄지 정하는 시대에, 1999년에 나온 이 영화가 여전히 가장 정확한 비유예요.

그럼 왜 기생충이 아니냐. 기생충이 덜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완성도만 보면 오히려 제가 이 목록에서 가장 흠 잡기 어려운 작품으로 꼽아요.

다만 제가 세운 기준이 1995년의 질문이었습니다. 기생충은 그 질문에 답한 영화가 아니라 다른 질문에 답한 영화예요. 계급이라는 질문에요. 그 질문에 대해서라면 저는 기생충을 1위에 두는 목록을 얼마든지 지지할 수 있습니다.

순위란 게 그래요. 작품의 서열이 아니라 기준의 표명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준을 맨 앞에 적어뒀습니다. 동의하지 않으신다면 그건 취향 차이가 아니라 기준 차이예요. 그쪽이 훨씬 생산적인 대화입니다.

솔직히

1위를 매트릭스로 적으면서도 손이 좀 떨렸습니다. 속편들 때문에 이 영화의 평가가 억울하게 깎인 면이 있거든요. 그런데 1999년의 그 한 편만 놓고 보면 저는 여전히 이 자리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최고의 영화 10편, 정리하면

1895년에 영화가 태어났고, 100년이 되던 1995년에 정반대 방향의 두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완전한 인공과 완전한 날것이요.

그 뒤 30년 동안 좋은 영화들은 전부 그 사이 어딘가에서 자기 자리를 정한 작품들이었습니다. 매드맥스는 실물 쪽으로 끝까지 갔고, 토이 스토리는 인공 쪽 끝에 섰고, 매트릭스는 그 경계 자체를 소재로 삼았어요.

그리고 지금은요. 인공지능이 이미지를 만드는 시대입니다. 1995년의 질문이 다시 돌아온 겁니다. 찍지 않은 것을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가. 30년 전에 두 진영이 갈라섰던 그 자리에 우리가 다시 서 있어요.

그래서 저는 이 최고의 영화 목록이 과거 정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벌어지는 일을 이해하려고 만든 목록이에요.

여러분의 1위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더 궁금한 건 어떤 기준으로 그 작품을 1위에 두셨는지입니다. 댓글로 남겨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순위 자체보다 기준을 읽는 게 늘 더 재미있더라고요.

작품 정보와 개봉 연도는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영화진흥위원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왜 1990년대부터인가요?

1995년이 영화 100주년이고, 그해에 토이 스토리와 도그마 95가 함께 나왔기 때문이에요. 이 축을 세우려면 그 앞뒤를 함께 봐야 해서 1990년대부터로 잡았습니다.

Q흥행 성적이나 수상 실적은 반영 안 하셨나요?

참고는 했지만 기준으로 쓰지는 않았습니다. 흥행은 시대 상황을 타고, 상은 그해 경쟁작에 좌우돼요. 대신 이후 영화의 문법을 바꿨는가를 봤습니다.

Q한국 영화가 기생충 한 편뿐인가요?

이 기준으로는 그랬습니다. 다른 기준을 세우면 목록이 완전히 달라져요. 기준을 바꾸면 순위가 바뀐다는 게 이 글에서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합니다.

출처

이 글의 순위와 평가는 글쓴이의 기준에 따른 의견이에요. 작품의 우열을 확정하는 것이 아니며, 개봉 연도와 수상 내역 등 사실 정보는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영화진흥위원회 자료를 참고했습니다. 줄거리 언급은 작품 이해에 필요한 범위로 제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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